
바쁘면 잘 사는 줄 알았다
바쁨 뒤로 바삐 숨는 마음들
바쁘게 살면 잘 사는 줄 알았다. 나는 늘 바쁜 사람이었다. 회사에서도 일상에서도 일이 끊이지 않았다. 일이 일을 부르는 것처럼 끝없이 이어졌고, 하나를 끝내면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걸 꽤 자랑스럽게 여겼다. SNS에 바쁜 일상을 올리며 ‘나는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때의 나는 바쁨이 곧 성실함이고, 성실함이 곧 나의 가치라고 믿었다.
하지만 아무리 일을 해치워도 개운하지 않았다. 분명 할 일을 끝냈는데도 어딘가 찝찝했다. 미션을 컴플리트한 느낌도, 오늘 하루를 잘 살았다는 충만함도 없었다. 나는 늘 다음 일을 향해 밀려가듯 움직였다. 그때는 일이 계속 생긴다고 생각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흐름 속에서 그저 따라가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일이 생기는 게 아니라, 내가 일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이 찾아오면 견딜 수 없었다. 마치 세상이 멈춘 것처럼 불안해졌다. 가만히 있는 시간이 나를 드러내버릴 것 같았다.
일로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 일이 사라지면 나도 사라질 것 같은 불안감, 그리고 이게 다가 아닐 것 같다는 막연한 감각. 그런 감정들이 올라올 때마다 나는 그것들을 느끼기보다 새로운 할 일로 덮어버렸다. 해야 할 일을 하나 더 만들고, 또 다른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바빠지면 괜찮아졌다. 생각할 틈이 사라지고, 감정은 뒤로 밀려났다. 회사 일에 몰두하는 동안은 모든 것이 정리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해결이 아니라 잠시 미뤄둔 것에 불과했다.
어느 날, 정말 이제는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신호가 몸에서부터 올라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을 멈추지 못했다. 쉬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나는 단순히 바쁜 게 아니라, 바쁨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바쁨 뒤에 숨겨두었던 것들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육아 휴직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멈추게 되었다. 갑자기 속도가 줄어들자, 그동안 싣고 달리던 짐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차가 급정거하면 짐이 앞으로 와르르 쏟아지는 것처럼, 바쁜 일들 사이에 숨어 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이유 없이 불안했고,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이 올라왔다. 나는 그 감정들을 오랫동안 보지 않으려고 애써왔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그때는 바쁨이 나를 지켜주는 것이라 믿었다. 감정을 느끼지 않아도 되게 해주는 안전한 장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건 지켜주는 게 아니라, 미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바쁨은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았다. 다만 문제를 잠시 보이지 않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요즘도 여전히 바쁘지 않으면 불안하다.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어색하고, 다시 무언가를 채워 넣고 싶어진다. 그때마다 예전의 방식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의도적으로 멈춘다. 숨을 고른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내가 느껴야 할 감정은 무엇인지, 지금 내가 외면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예전에는 그런 질문을 피했지만, 지금은 그 질문 앞에 조금 더 오래 머물려고 한다.
여전히 완벽하게 해내지는 못한다. 여전히 도망치듯 바빠지는 날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달라졌다. 같은 바쁨이라도 그 결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의 바쁨은 감정을 덮기 위한 도망이었고, 지금의 바쁨은 내가 선택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움직임이다. 겉으로 보면 똑같이 바빠 보일지라도, 그 안의 이유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바쁘게 산다. 하지만 예전처럼 바쁨에 끌려가지 않는다. 가끔은 멈추고, 가끔은 돌아보고, 그 안에서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확인하려 한다.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제는 알고 있다. 내가 왜 움직이고 있는지, 그리고 이 바쁨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그 사실만으로도 예전보다 조금은 덜 흔들린다.
나는 아직도 연습 중이다. 도망친 바쁨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바쁨을 살아내는 연습을. 그리고 그 사이에서, 멈춰 서서 느껴야 할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는 연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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